어느 날, 내연녀가 집을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면 아내가 문을 열겠지. 그리고 그녀가 내 아내에게 말을 걸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뭐라고 생각할까. 그때도 바깥 정원에서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릴까. 가을이 다가오는 요새 밤에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한다. 얼마 전에 비가 오래 와서 울타리 곁에 심어둔 꽃들이 전부 시들어버렸다. 꽃잎을 만져 봤는데 더는 살아있지 않다는 게 촉감으로 느껴졌다.
낮도 밤도 내 걱정을 사라지게 하지 못하고, 구름은 멀리서부터 개어지고 있고, 주말에는 오래도록 잠자고 밭일하고 걷고 운전한다. 평일에는 시내에 있는 대학에 출근한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 하늘에는 별이 떠 있고, 총총하다. 자동차 불빛으로 어둠을 뚫고 나서다 보면 어느새 동이 먼 곳에서부터 터 오고, 서울 시내에 들어선다. 그리고 나서 책을 읽고, 약속들을 잡고 그리고 가끔씩은 소설을 쓴다. 남편이 죽은 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소설을.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들을 받아들일지 생각하면서.
아직도 가끔은 잠에서 실종된 친구를 본다. 그 친구는 상한 곳 하나 없이 나와 함께 대학 근처의 산책로를 걷는다. 우리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 말들은 풀벌레 소리만큼 가볍다. 우리는 말 없이 걷기도 하지만 그 침묵은 풀벌레 소리만큼 시끄럽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대학생들을 두고 수업을 하다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애는 여기에 없다. 실종되어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동창회에서 그 친구 얘기가 나오면 나는 두 번째 놀란다. 아무도 그 애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말로 경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 또한 그 애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해졌다는 걸 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애 얼굴도 희미해졌다. 그 친구와 함께 대학가 골목에 주저앉아 막걸리를 토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게 그라고? 그런데 어느날 사라져버렸다고?
비가 오고, 학생들이 누군가를 험담하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수업에서 시덥잖은 농담을 한다. 학생 하나가 먼산 쳐다보는 걸 구경하고, 캠퍼스 산책로를 걷고, 다른 교수들을 만나면 인사를 하고, 그리고 회의 때는 앉아서 나이 든 사람들의 심사를 살핀다. 그리고 연구실에 앉아 늦게까지 혼자 학생들의 앳된 얼굴에 대해 생각한다. 그 애들이 받는 생생한 상처를, 그 애들이 언젠가 늙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밤늦게 토한 술도, 버린 마음도 신세도 전부 물러져서,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는 걸 생각한다. 아무런 전화도 오지 않는 전화기를 보고 그리고 술이나 까다가 잠든다.
이런 날이면 아내에게는 학회 뒤풀이가 있다고 곧잘 거짓말을 해 왔다. 그걸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궁금해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대학 동창인 아내가 한때, 실종된 그 친구를 사랑했다는 걸 기억한다. 함께 대학을 다니고 함께 그 시절에 화염병을 던지던 그녀가, 그이에게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고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 친구에게 잘못한 일들에 대해서라면,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함께 술을 마시고 아팠던 일들을 털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될 때까지 나는 연구실과 집을 오가며 시간을 어떻게든 조금씩 죽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