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마시오.’ 빨간색 궁서체로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워 뽑고, 시설 좋은 프린트 카페에서 코팅까지 한 경고문을 담벼락에서 뗐다. 용의자가 특정되어서다. 매일매일 남의 집 대문 안으로 담배꽁초를 던지는 사람은 옆 건물 3층 사는 냄새 나는 노인네였다. 방범용 CCTV를 옆 건물 방향으로 돌려놓고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그 노인네가 계단 창으로 고개를 내민 채 담배를 피우고, 당연한 듯 이쪽으로 던져 버리는 장면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이제 이 영상으로 뭘 어떻게 하지. 신고하자니 남의 건물을 몰래 촬영한 게 마음에 걸렸다. 사정을 잘 설명하면 정상참작을 해줄지도 모른다. 전에 옆 건물 건물주 아저씨랑 어쩌다 친근하게 스몰토크를 나눠보기도 했었는데, 건물주한테 꼰지를까. 아니면 그 노인네 집 앞에다가 쪽지를 써 붙일까. 너인 거 알고 있다고, 형사 고발하겠다고. 너무 세게 나갔다간 해코지 당하려나.
하여튼 밍숭맹숭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전에 4차원 캐릭터로 사랑받는 남배우가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이 생각났다. 저는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냥 사랑해 버려요. 퇴근길 지하철에서 하필 내 옆자리에 딱, 딱, 하며 손톱을 깎는 사람이 있으면 어때요? 너무 싫죠. 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사연은 있을 거 아닙니까.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만약 몇 년간 좋아하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서 급하게 손톱을 깎는 거라고 생각해 보면 어때요? 그 남배우의 말은 혐오가 시대정신인 시대에 사랑스럽게 경종을 울리는 아기천사의 나팔 소리 같았다. 난 그때부터 그 배우를 혐오하게 됐다. 굳게 닫힌 대문 안까지 폭우처럼 들이치는 세상의 악으로부터 나를 지키느라 속에 악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내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패배감만 남겼다.
넌 여자니까 마음만 잘 먹으면 살기가 좀더 쉬울 거야. 이건 길바닥의 꽁초까지 주워 피우던 시절에 같이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
이 소설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는 인문 실험 ‘낯선 감정 워크룸 : 혐오 넘어가기’ 프로젝트의 과제물로 작성되었다. 1차 오프라인 워크숍에서 주최자들은 실험의 목적과 방법을 설명하고, 밸런스게임-포스트잇 붙이기-설문조사의 순서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을 혐오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답변을 끌어냈다. 혐오하는 대상에서 ‘나’는 제외해야 한다고 했다. 참여자 대부분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엇비슷한 나이대의 청년들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혹은 공적인 자리라서인지, 싫어하는 사람도 비슷했다.
나는 내가 생각보다 용서할 수 없는 인간상이 없다고 느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제가 싫어하는 사람은, 대놓고 혐오 팻말을 들고 다니는 사람보다 주변에 혐오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싫은 사람 유형을 열심히 생각해서, 여성 승객인 나에게 여성 운전자에 대한 미소지니를 공감받고 싶어하던 택시기사의 일화까지 들어 말했다. 맞아요, 그런 사람들 있죠, 저도 딱 그런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유는 조금 달라요. 다시 볼 일 없을 사람들이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면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말없이 빤히 쳐다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사실 나는 그 택시 기사에게 조용히 좀 가달라고 말했고, 추후 앱으로 별점 1점을 남기며,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 회사 차원의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고 썼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내 편이 될 만한 사람에게 그 기사의 흉을 봤다. 할 수 있는 모든 대응을 했으므로 마음속에 남은 미움은 없었다. 그런 것 말고 정말로 마음에 남는 건, 용서할 수 없는 건…….
시와 소설 창작을 통해 혐오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자는 취지의 프로젝트.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나는 글을 쓰기 전부터 정말로 혐오하는 대상을 찾아서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래,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언제부터 속이 곪아 터졌나. 그런데 혐오에 대해서 며칠간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그날 차별과 배제와 소외를 싫어하는 우리가 공적인 자리에서의 예의를 지키며 이야기한 것 중에 정말 ‘혐오’라고 할 만한 게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과제를 최대한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참고 자료가 될 만한 책도 구입했다. 200년 전 영국에서 쓰인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 책의 추천사에 직설적인 문체로 유명한 장강명 작가는 이렇게 썼다. “2020년대는, 혐오의 즐거움이나 죽음의 공포, 질투의 유용성,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 같은 화제를 한사코 피하는 시대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혐오는 나쁜 것이라고 외쳐야 하며, 그 즐거움에 대해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을 때에나 겨우 털어놓을 수 있다.”
정말 그렇다. 도입부에 넣은 담배꽁초 버리는 사람 이야기는 혐오를 직면하라는 요구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이렇게 쉽게 뱉을 수 없는 진짜 혐오는 내 심장 안쪽에 묵은 가래처럼 들러붙은 어떤 기억의 덩어리로, 매일매일 담배꽁초처럼 튀어나와 나를 모욕하지만 그 모욕을 수거하면서만 나는 제자리에 살아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